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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갈 벌컥 것 알고는 포기해야겠군. 안“엄마, 저에게 두 번의 귀한 삶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17세에 홀로 두만강을 건너 한국에 온 탈북민 작가 한송미 씨(31)는 지난 1일 뉴스1TV와의 인터뷰에서 정착 이후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태어나 살아낸 시간과 탈북 끝에 한국에서 새로 시작한 인생이 그에겐 ‘두 번의 선물’과 같았다.

처음 마주한 한국…6년 반 만에 눈물의 재회

한 씨는 지난 2011년 생사를 넘나드는 탈북 과정을 거쳐 겨우 한국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를 바로 만날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한 직후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에서 3개월의 정착 교육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국정원 직원들이 긴장감을 줬바다이야기하는법
지만, 오히려 멋있다고 생각했다”며 웃어 보였다. 국정원 조사 과정은 치밀했다. 태어난 마을을 지도로 그려야 했고, 주변 인물과 가족 관계까지 낱낱이 설명해야 했다. 한 씨는 “제가 말한 주소를 곧바로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실제 제가 살던 집이 떠서 너무 놀랐다”며 “그때 컴퓨터를 처음 봤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세유니온 주식
계였다. 그제야 대한민국에 도착했다는 걸 실감했다”고 회상했다. 5개월에 걸친 복잡한 절차와 교육 과정이 끝나고 무려 6년 반 만에 이뤄진 어머니와의 재회는 그에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한 씨는 눈물이 쏟아졌지만, 어머니의 첫마디는 “너 우리 딸 맞아?”였다. 2005년 탈북한 어머니는 그간 북한에 있는 자신의 여동생이자 한 씨의 이모를 통해 생예림당 주식
활 자금을 보냈으나, 그 돈이 딸에게 닿지는 못했다. 이모는 타지에 있는 어머니와 전화를 할 때마다 “송미가 학교도 잘 다니고 키도 많이 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 두 명만 학교를 보냈고, 한 씨에게는 하루 종일 집안일과 나무를 시켰다. 한 씨는 “엄마가 상상과 다르게 왜소하고 초라한 제 모습을 보시고 우셨다”며 “제가 살아온 삶을 몰랐다광진윈텍 주식
는 사실에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고 털어놨다.

“아들을 위해 버텼다” 삶을 바꾼 도전

한 씨는 한국에서 뒤늦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들어서던 순간을 떠올리며 “북한에서는 다른 학생들이 공부하는 소리를 정문에서 엿들었다”며 “교복 입는 게 꿈이었는데,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안전 검증 릴게임
설렜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의 기대감과는 다르게, 정착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 사회의 치열한 경쟁을 마주하게 되면서 북한에서의 트라우마와 우울증이 겹쳐 한동안 방 안에만 머물렀다고 했다. 한 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한국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며 “살아남으려면 무언가 붙잡아야 했는데 그게 영어였다”고 말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무료 영어 교육 단체에 연락했고, 매일같이 언어를 붙잡으며 자신을 다잡았다. “죽도록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한 선택은 그의 삶을 바꾸는 분기점이 됐다.

북한과 남한, 주어진 두 번의 삶

한 씨는 앞으로 탈북민을 향한 오해를 푸는 활동을 해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탈북민들은 심장이 없나 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자식을 두고 혼자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느냐’고 한다”며 “가족을 두고 먼저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을 향해 오해를 품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탈북 과정에서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북한에 남겨두고 오는 것 보다 못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엄마 역시 탈북 과정에서 늘 죽음을 각오했다”고 전했다. 탈북 과정에서 붙잡힐 경우를 대비해 독약을 챙겼고, 무사히 강을 건넌 뒤에도 매일 밤을 술로 겨우 잠들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가 쓴 일기장에는 딸을 두고 온 죄책감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고도 했다. 한 씨는 “엄마가 걸음걸음마다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셨다”며 “그 눈물이 얼마나 무거운지, 저도 아이를 낳고 나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저는 북한에 남겨진 아이의 입장, 또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모두 겪어본 사람”이라며 탈북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어머니를 향해 “저에게 두 번의 귀한 삶을 주셨다”며 “북한에서 저를 낳아주신 삶, 탈북 시켜 한국이라는 자유의 땅에서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신 삶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한편 어머니와의 극적인 재회부터 한국 사회에서 새로 시작한 삶의 방향성을 찾기까지, 한송미 씨의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yoonzz@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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