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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지난 9일 네팔 카트만두에서 정부 부패에 항의하는 청년 시위대가 샤르마 올리 총리 사임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카트만두=로이터 연합뉴스


“공정과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달랐다. 청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보다 출신과 연줄이 더 큰 힘을 발휘 우리미소금융재단 했다. 세대·계층 간 불평등이 분노의 뿌리였다.”
네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Z세대 활동가 중 한 명인 샤스왓 라미차네(18)는 23일 한국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저항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시위 과정에서 소통의 장이 된 온라인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 채널, '부패에 맞서는 청년들(Youths Against Corruption)' 신용정보업자 운영진 가운데 한 명이다. 시위대가 임시 총리 추천을 위해 군과 만났을 때도 현장에 있었다. 시위 중심 인물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네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Z세대 활동가 샤스왓 라미차네. 라미차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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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가 청년 미래 가로막아"
지난 8일 네팔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안돼 정권은 무너졌다. 조직화된 정당도, 군부 쿠데타도 아닌 교복을 입은 10대와 대학생이 주축이 된 Z세대의 봉기가 낡은 질서를 무너뜨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석 달밖에 안된 라미차네도 그중 하나다.
소상공인연합회발단은 정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차단 조치였다. 그러나 뿌리는 훨씬 깊었다. 정부 부패와 족벌주의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은 이미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인구 3,000만 명 중 4분의 1이 빈곤선 아래 살고, 청년 실업률은 22%를 넘는다.



네포키즈(nep 예대금리차 okids)로 불리는 네팔 기득권층 자녀들의 사치스러운 모습들. 네포키즈는 특혜를 뜻하는 영어 '네포티즘'과 '키즈'의 합성어다. X캡처


많은 젊은이들이 생계를 위해 해외로 떠나는 사이, 네포키즈(nepokids)로 불리는 기득권층 자녀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이 모습이 SNS를 통해 퍼지며 청년들의 분노를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플랫폼 금지는 폭발을 촉발한 불씨가 됐다.
라미차네는 “SNS 차단은 명백한 표현의 자유 억압이었다. 그러나 더 큰 분노는 특권과 세습, 부패가 젊은 세대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강조했다. “네포키즈는 그 자체로 체제의 불공정성을 상징했다”며 “우리의 앞날이 도둑맞고 있다고 느꼈다. 환멸은 분노로 바뀌었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도 덧붙였다.



8일 네팔 정부의 SNS 금지와 부패에 항의하는 인파가 카트만두 국회의사당 앞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카트만두=AFP 연합뉴스


결국 시위는, 부패와 불평등으로 미래를 빼앗긴 Z세대가 마지막 남은 소통 창구마저 막히자 터져 나온 필사적 저항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7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화가 난 일부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와 정부 청사를 불태우기도 했다.



네팔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지난 8일 카트만두 국회의사당 앞에서 부상당한 시위자가 동료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정부의 SNS 차단 조치에 반발한 반부패 시위가 유혈 충돌로 번지며 70명 이상이 사망했다. 카트만두=AP 연합뉴스



디지털 의회가 된 '디스코드'
네팔 시위가 다른 나라 반정부 운동과 달랐던 점은 청년들이 디지털 플랫폼을 적극 활용했다는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Z세대는 정부 통제를 비웃듯,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저항을 조직했다.
특히 핵심 도구는 게이머들이 주로 쓰던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였다. 여러 채널 가운데 시민단체 ‘하미 네팔(우리는 네팔이다)’이 운영하는 서버 ‘부패에 맞서는 청년들’은 최대 규모다. 시위 전 2,000여 명이던 회원 수는 8일 시위 직후 4만 명이 넘었다. 나흘 뒤에는 15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지난 8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 국회의사당 앞에서 디스코드 그룹 중 최대 규모인 '부패에 맞서는 청년들' 소속 시위대가 그룹명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기득권의 부패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카트만두=AFP 연합뉴스


채널은 곧 공론장이자 ‘디지털 의회’가 됐다. 온라인상에서는 ‘누가 차기 수장에 적합한가’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고 모의 투표 결과 수실라 카르키 전 대법원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시위대는 여론을 아쇼크 라즈 시그델 육군 참모총장에게 전달했고, 람 찬드라 포우델 네팔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카르키 전 대법원장을 임시 총리로 임명했다. 정부가 막으려 했던 SNS가 역설적으로 차기 지도자를 선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네팔 시위 공론장 역할을 한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 화면 모습. 가장 큰 규모 그룹인 '부패에 맞서는 청년들' 서버에 참가자들이 임시 총리 선출 당시 투표한 내용이 게시돼 있다. 현재 해당 채널은 회원 가입 신청을 승인하지 않는다. 다만 디스코드에 접속하면 투표 결과는 확인할 수 있다. 디스코드 캡처


다만 라미차네는 “(디스코드 투표는) 선거를 감독할 수 있는 임시 지도자를 제안하는 게 목표였다”며 채널이 네팔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운영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라미차네는 “가장 어려웠던 점은 포용성과 질서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었다”면서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개방성과 투명성이 기존 정치와는 다른 정당성을 줬다”고 평가했다.



지난 11일 네팔 카트만두 육군 본부 앞에 군과 임시 총리를 논의하려는 시위대 주요 관계자들이 모여있다. 9일 샤르마 올리 총리가 사임한 뒤 Z세대가 주축이 된 시위 세력은 이날 과도 정부 수반으로 수실라 카르키 전 대법원장을 추천했다. 카트만두=AFP 연합뉴스


시위대가 특정 인물에게 ‘대표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만큼 혼란도 적지 않았다. “시그델 참모총장이 11일 시위대를 육군본부 회담에 초청했을 때, 약 20개의 그룹이 있었다. 총장도 시위대가 얼마나 분산돼 있는지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결국 우리에게 함께 앉아 ‘공동의 의제’를 정하자고 제안했다.” 라미차네는 당시 논의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붕괴 역시 예상 밖 결과였다. 시위대가 분노하긴 했지만, 정권 교체가 향후 ‘선거’로 이뤄질 것이라고 여겼지, 곧바로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수실라 카르키(가운데) 네팔 신임 총리가 12일 카트만두 대통령궁에서 선서를 한 뒤 지지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그는 반부패 시위로 기존 정부가 축출된 뒤 과도 정부를 이끌게 됐다. 카트만두=AFP 연합뉴스



새로운 네팔 향한 첫 출발
시위 발생 2주가 지난 지금, 수도 카트만두 등 주요 도시는 안정을 되찾고 있다. 파괴된 시설 복구 작업도 한창이다. 시민들은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다.
라미차네는 앞으로 네팔 정치가 △제도적 공정성 △디지털 거버넌스 △포용적 민주주의를 갖추길 바란다고 말했다. ‘빽’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누구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투명한 사회, 청년·여성 등 소외된 집단들이 단순한 상징이 아닌 주체로 참여하는 사회가 그가 꿈꾸는 미래다. 카르키 임시 정부의 출범은 엘리트 세력과의 단절이자 새로운 네팔로 향하는 첫걸음이 됐다.



19일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 빠띠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한 청년이 ‘네팔에서 배워라’라는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네팔 Z세대가 촉발한 거리의 분노는 인근 아시아 국가로까지 번지고 있다. 빠띠=AFP 연합뉴스


이번 시위를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라미차네는 “시민이 단결하면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라고 답했다. 그는 “권력은 결코 성역이 아니며 부·지위와 무관하게 누구도 정의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부패가 반복될 경우 시민은 또다시 들고 일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 여정을 언급하며 국제 연대도 호소했다.
“한국 청년들이 촛불을 들어 기득권에 평화적 저항의 힘을 보여줬던 것을 기억한다. 작은 불꽃은 모여 무시할 수 없는 빛의 물결이 됐고, 그 장면은 네팔 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언어와 시위 형식은 달랐지만 그 정신은 같다. 한국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용기를 준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가 아직 일어서지 못한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한 네팔 청년이 9일 카트만두 정부청사 앞에서 국기를 펼치며 기득권의 부패에 항의하고 있다. 카트만두=로이터 연합뉴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